어릴 적 겨울만 되면 할머니 손에 이끌려 시장 끝 쪽 설렁탕집에 들르곤 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그 하얀 국물, 갓 지은 밥 한 공기 푹 말아 김치랑 한 입 떠먹으면 온몸이 따뜻해졌다.
그 시절 맛을 떠올릴수록 설렁탕은 단순한 음식이 아닌, 누군가의 손길과 시간이 느껴지는 정성의 음식이다.
설렁탕이란?
설렁탕은 소의 뼈, 머리, 내장 등을 오랜 시간 푹 고아낸 국물 요리다.
진하면서도 담백한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방식이 일반적이며, 곁들여 나오는 김치, 깍두기, 파는 설렁탕의 진짜 친구다.
이 한 그릇에는 단순한 포만감을 넘어선 깊은 시간과 노동, 그리고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다.
설렁탕의 기원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선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고려 말~조선 초, 성군 세조 또는 성종 시절의 ‘선농단 제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그 시절 임금은 백성의 생업을 이해하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몸소 제사를 지내고 농사를 체험하는 ‘선농제’를 치렀다.
제사가 끝난 후, 모인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소 한 마리를 잡아 국을 끓여 나눠주는 음식이 바로 설렁탕의 시초라는 것이다.
당시엔 소의 다양한 부위를 전부 사용해 국을 끓였고, 수많은 사람이 함께 나눠 먹어야 했기 때문에 국물이 맑기보다는 뽀얗고 양이 많은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이 국물은 ‘선농탕(先農湯)’으로 불리다가 발음이 변해 ‘설렁탕’이 되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오랜 시간, 천천히 끓여낸 국물
설렁탕 국물은 조급한 마음으로 만들 수 없다.
소의 사골, 잡뼈, 머리뼈, 도가니 등을 약 10시간 이상 끓여내야 특유의 뽀얀 국물이 나온다.
끓일수록 국물은 깊어지고, 뼈 속의 영양분까지 녹아들며 고소하고 부드러운 감칠맛을 낸다.
정통 설렁탕집은 하루에 다 끓이지 않는다.
며칠을 걸쳐 뼈를 우려내고, 국물 상태를 매일 체크하면서 농도를 맞추는 것이 장인의 손맛이다.
이렇게 오래 고운 국물에 머릿고기, 양지, 사태, 도가니 등 부드러운 고기를 얹고, 밥과 함께 내는 것이 우리가 아는 설렁탕의 모습이다.
곁들임의 미학: 김치와 파
설렁탕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주인공은 잘 익은 깍두기다.
맵고 시큼하면서도 아삭한 그 깍두기가 담백한 국물과 찰떡처럼 어울린다.
김치 역시 빠질 수 없다. 고기 국물에 느끼함을 잡아주는 신선하고 시원한 발효된 맛이 설렁탕을 완성한다.
또 하나, 설렁탕에는 파를 듬뿍 넣는 문화도 있다.
지역에 따라 파를 국물에 아예 넣어 끓이기도 하고, 파 다진 것을 따로 그릇에 담아 원하는 만큼 올려 먹는 방식도 흔하다.
파의 알싸한 향이 국물에 어우러지면 풍미가 배가된다.
지역별 특징과 변화
서울을 중심으로 설렁탕이 대중화되면서 지역마다 조금씩 조리법과 국물 맛이 달라졌다.
- 서울식 설렁탕은 국물이 뽀얗고 부드러우며, 고기와 도가니, 머릿고기를 골고루 사용한다.
-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국물에 간을 하지 않고 소금을 따로 넣어 먹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 요즘은 젊은 세대 입맛에 맞게 사골과 고추기름을 함께 끓여낸 매운 설렁탕도 등장했다.
또한, 예전에는 장터나 시장 근처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설렁탕집이 지금은 프랜차이즈화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배달 설렁탕, 간편식 설렁탕, 심지어 레토르트 파우치로도 출시되어 바쁜 현대인도 그 맛을 쉽게 즐길 수 있다.
설렁탕이 주는 따뜻한 위로
설렁탕은 단지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다.
오래 끓인 정성, 소의 모든 부위를 아낌없이 사용한 절약 정신, 그리고 나눠 먹는 공동체 문화까지 함께 담긴 음식이다.
속이 허할 때, 몸이 으슬으슬 추울 때, 마음이 지칠 때 생각나는 음식이 바로 설렁탕이다.
하얀 국물 위로 파 송송, 소금 살짝, 깍두기 한 점 올려 밥을 말아 먹는 그 순간.
우리는 단순한 한 끼가 아닌, 오래된 위로를 맛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렁탕 레시피 (4~6인분)
기본 재료
- 소사골 1.5kg
- 잡뼈 (우족, 꼬리뼈, 잡뼈 등) 1kg
- 양지머리 또는 사태살 300~500g (고명용 고기)
- 대파 1~2대
- 마늘 10쪽 (선택)
만드는 법 (총 12시간 이상 소요)
1. 뼈 핏물 빼기 (4~5시간)
- 사골과 잡뼈를 찬물에 4시간 이상 담가 핏물을 빼줍니다.
- 중간에 물을 2~3번 갈아주세요.
2. 첫 끓임 (잡내 제거)
- 핏물 뺀 뼈를 큰 냄비에 넣고 물을 잠길 만큼 붓고 센불에 끓이기 시작합니다.
- 끓기 시작하면 5분 이내로 거품과 핏물 올라오면 바로 버리기
- 뼈는 꺼내어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세척합니다.
3. 본 끓이기 (최소 6~12시간)
- 깨끗해진 뼈를 다시 냄비에 넣고 물 4~5L를 붓고 끓입니다.
- 센불 → 끓으면 중약불로 줄여서 6~12시간 끓이기
- 중간에 물이 줄면 뜨거운 물을 보충하세요.
- 뽀얀 국물이 될 때까지 끓이는 게 핵심입니다.
💡 뼈는 2~3번 재탕도 가능! 국물은 따로 보관하면 좋아요.
4. 고명용 고기 삶기
- 양지머리나 사태는 끓는 물에 1시간 정도 삶아 익힌 뒤 식혀 결대로 썰어 고명으로 사용합니다.
먹는 방법
- 설렁탕 국물에 밥과 고기를 넣고, 소금·후추·다진 파·다진 마늘 등으로 개인 취향에 따라 간을 합니다.
- 김치(깍두기/배추김치)와 함께 먹으면 찰떡 궁합!
팁
- 압력솥을 사용하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요 (3~4시간).
- 냄비 바닥이 눌어붙지 않도록 불 조절에 주의하세요.
- 보관용은 식혀서 국물과 고기를 따로 냉동하면 간편하게 꺼내 먹을 수 있어요.